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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면의 밤을 건너는 당신에게

-기형도, 『기형도 전집』, 문학과지성사, 1999

-2016.07 작성


“기형도 산문집을 읽다 느낌이 많다. 짜식 스물아홉에 신춘문예 당선이라니 그럴 만도 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관심사에 목메다는 것이니까. 다른 이들보다 좀 더 나은 것을” (하략) 지난달 가수 김광석의 사망 20주기를 추모하는 전시회 <김광석을보다展; 만나다·듣다·그리다>를 관람했다. 여기서 김광석이 직접 쓴 메모도 볼 수 있었는데 기형도의 글이 인상적이었나 보다. 평소 좋아했던 김광석을 담은 사진과 그의 흔적을 찾아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그와 시인 기형도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있다는 사실에 무척 흐뭇해하던 기억이 난다. 참고로 기형도가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것은 1985년, 만으로 25살이 되던 해다. 나이도 기형도가 네 살 더 ‘형’이다.


김광석도 기형도를 읽었구나. 어쩐지 반가웠다. 그가 네 살이나 더 많은 기형도를 ‘짜식’이라고 부른 것도 동질감의 표현이었을까. 예전부터 두 사람이 묘하게 닮았다고 생각했다. 물론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다. 지금껏 영상과 사진으로 (밖에 못) 보던 김광석의 눈빛은 어딘가 깊고 언제나 습했고 그건 기형도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가 부르던 노랫말에선 기형도의 시를 읽을 수 있었다. 두 사람의 노래와 시를 좋아했기에 그들이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난 것을, 그래서 동시대인으로서 그들을 접할 수 없다는 사실은 지금도 안타깝다. 집으로 돌아온 그 날 저녁, 다시 책장에서 『기형도 전집』을 꺼냈다.


『기형도 전집』은 지난 1999년, 기형도 사망 10주기를 기념하기 위해 고인과 친분이 있던 문인들이 전집 편찬위원회를 꾸려 발간한 추모 전집이다. 불행하게도 그는 생전에 단 한편의 시집도 출간하지 못했다. 출간을 준비하던 1989년 3월 7일 새벽, 서울 종로의 한 극장에서 숨졌기 때문이다. 이듬해 5월 그의 작품들은 『입 속의 검은 잎』이란 이름으로 뒤늦게 세상에 나왔다.


이 전집은 그가 생전에 발표했던 시와 소설 외에도 그동안 전해지지 않았던 작품들, 그리고 수필과 일기까지 담고 있다. 전집의 특성상 수록된 작품을 처음부터 끝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은 큰 의미가 없다. 그저 어느 날, 어느 순간, 한 편씩, 한 문장씩 찾아 읽는다. 도무지 캄캄하기만 한 밤엔 “장님처럼 나 이제 더듬거리며 문을 잠그네/가엾은 내 사랑 빈집에 갇혔네”<빈 집>,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단 한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질투는 나의 힘>, “미안하지만 나는 이제 희망을 노래하련다."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읽었다.


요즘 손길이 자주 가는 쪽은 시보다는 수필이다. 수필이되 작품이 아닌 일기에 가까운. 시인이 살아있더라면 절대 접할 수 없었을 그의 감상들. 일기가 세상에 드러나는 것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면 시인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지만 모든 일기는 무의식적으로 독자를 상정한 채로 쓰인다는 말을 변명 삼아 읽는다.


전집에 수록된 <짧은 여행의 기록>은 사망하기 일곱 달 전 시인의 행적을 보여준다. 당시 기자 생활 중이던 시인은 여름휴가를 맞이해 여행을 떠난다. 전주 황방산에 자리한 서고사를 찾은 시인은 그곳에서 하룻밤을 머문다. 그때 시인은 어떤 상처를 입고 깊은 늪과 같은 어둠 속을 방황하며 지나는 중이었던 것 같다. "나는 너무 좁다. (중략) 난 얼마나 작은 그릇이냐. 막상 그 작은 접시를 벗어났을 때 나는 너무 쉽게 길을 잃는 것이다. 그러나 서고사의 밤은 깊다. 풀벌레 소리 하나만으로 나는 이 밤을 새도록 즐길 수 있다.”(중략)“내가 내 생(生)에 얼마나 불성실했던가, 생을 방기했고 그 방기를 즐겼던가를 서고사 일박을 통해 깨달았다”(302p) 이 표현이 단순한 수사가 아니라면 이 무렵 그의 삶과 정서 전반을 무겁게 누르던 허무와 우울, 어둠을 어느 정도 극복한 것처럼 보인다. 이듬해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그래서 더욱 안타깝다.


시인은 첫 시집의 제목으로 ‘정거장에서의 충고’를 고려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의 작품 중 몇 안 되게 ‘희망’을 그리는 시다. 달라진 인식과 삶을 위한 시인의 다짐이었을까. 그가 죽지 않고 지금도 시를 쓰고 있다면 그의 문학 세계는 지금과는 사뭇 달랐을 것 같다.


지금도 불면의 밤이 오면 그를 찾는다. 나 아닌 누군가도 비슷한 허무, 외로움, 우울을 느꼈을 수도 있다는게 위안이 될까. 훔쳐 본 일기 속 한 구절이 꾸짖듯이, 달래듯이, 다가온다. “성장이란 외로움을 타개해나가는 속에서 스스로 슬기를 얻어나가는 과정이리라.”(328p)


*지난 해 11월 10일 경기도 광명시에 기형도 문학관이 개관했다. -2018.0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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