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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이 없는 시대에 저녁을 꿈꾼다는 것
-토마스 바셰크 지음, 이재영 옮김,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 열림원, 2014
한 때 ‘저녁이 있는 삶’이란 표어가 회자된 적이 있다. 어느 정치인이 내세운 슬로건이었는데, 야근없이 정시에 퇴근해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여가를 즐기는 등 일과 삶이 조화를 이루는 풍요로운 삶을 은유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반응은 뜨거웠다. 비록 이 슬로건을 내세운 후보는 낙선했지만 '저녁이 있는 삶'은 지금도 매혹적인 정치 슬로건의 교본처럼 회자된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정치적 수사에 열광했다는 점은 그 만큼의 사람들은‘저녁이 없는 삶’을 살아내 왔다는 뜻이다.
대다수 (노동자로서) 성인은 하루에 8시간 이상을 일터에서 보낸다. 통근과 준비에 드는 시간 등을 감안하면 하루의 1/3을 넘어 절반 가까운 시간이다. 단순히 보수적으로 계산해도 생애에서 가장 활발한 청장년기의 1/3 이상을 일하면서 보낸다. 따라서 아무리 저녁이 있는 삶이 보장되고, 일과 삶의 균형이 잘 잡혀도, 그 만큼의 시간에 대한 만족도는 일터에서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즉 좋지 않은 노동은 삶을 불행하게 만들며, 좋은 노동은 삶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노동에 대한 새로운 철학>에서 저자는 직업과 노동이 삶의 질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동의하지만 현실을 어떻게 개선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색다른 논의를 전개한다. 우선 노동 시간 줄이기, 기본 소득을 통한 노동없는 사회 등에 비판적으로 접근한다. 이는 기존에 등장했던 비판 이론들이 노동 시간 단축, 기본 소득 도입 등을 골자로 했던 것과 배치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저자는 기존의 비판과 대안이 노동을 단순히 생계의 수단으로 인식하고 최소화의 대상으로만 여겼다는데 한계가 있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진정한 노동은 그 자체로 내재적 가치를 지녔으며, 노동의 본래적 가치를 인식하고 회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리에게 필요한건 적은 노동과 많은 여가가가 아닌, 많은 ‘좋은 노동’이라는 것이다. 이에 따르면 오늘 날 실업과 노동 문제에 자주 등장하는 적정 강도, 적정 임금의 ‘양질의 일자리’패러다임은 극복의 대상이 된다.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좋은 노동’을 추구해야 하며 ‘저녁이 있는 삶’에 집착하지 않을 수 있도록 노동에서 가치를 찾아야 한다는 것이 저자의 일관된 메시지다.
물론 이 책의 문제인식에 반드시 동의할 필요는 없다. 노동은 정말 신성하고, 그 자체로 의미있게 여길만한 대상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노동을 통해 생계 이외의 가치를 찾겠다는 것은 대다수 사람들에게 기대하기 힘들 것 같다. 저자의 논의는 다소 이상적이고, 한국의 노동 환경과 사회적 특성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인상도 지울 수 없다. 아마 저자가 한국에서 태어났다면 책의 방향은 상당히 달려졌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짧은 노동과 많은 여가에 집착"하는 것이 아니라, 너무나도 긴 노동과 즐거움이 없는 삶에 지쳐버린게 아닌가.
그럼에도 노동이 오직 생계의 수단 밖에 될 수 없는 세상은 우울하다. 그것이 비록 현실에 가까운 묘사라 하더라도, 누군가는 다른 가능성을 그려보아야 한다. 이미 저녁이 없는 시대에서, 저녁이 없어도 되는 삶을 상상하는 일이 겉보기엔 유쾌해 보이지 않지만 그것이 더 나은 삶을 위한 또 하나의 상상력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있는 시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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