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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을 넘어(越墻) 성장(成長)하다[각주:1]: 『앵무새 죽이기』와 『앨저넌에게 꽃을』 함께 읽기

-하퍼 리 지음, 김욱동 옮김, 『앵무새 죽이기』, 열린책들, 2015
-대니얼 키스 지음, 구자언 옮김, 『앨저넌에게 꽃을』, 황금부엉이, 2017




1. 들어가면서

성장(成長), 듣기만 해도 마음이 들뜨는 단어다. 하지만 만으로도 어느덧 스물다섯인 나에게 성장 소설이 여전히 눈에 들어온 까닭은 단순히 ‘성장담’이 일으키는 푸른 심상 때문만은 아니다. “내 이름은 스물 두 살/한 이십 년쯤 부질없이 보냈”다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지나온 삶이 온통 “후회”와 “불안스런 그림자”들로 가득한데, 성장이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한 이십 년쯤” 훌쩍 넘어 살았지만, 아직도 어른이 되지 못한 나에게 성장담이 눈에 들어온 까닭은 역설적이게도 성장이 끝나 버린 것만 같은 느낌이 오랫동안 이어졌기 때문이다. 여전히 유약하고 세상이 기대하는 일 인분의 몫을 제대로 해낼 준비가 되지 않은 이에게 ‘성장’이란 가닿지 못한 이데아이자 지나지 못한 통과의례다. 그런 사람은 오랫동안 정체된 상태에 머물러 있으며, 한없이 이 세상을 부유하고 있다는 느낌에 괴로울 것이다. ‘언제쯤 비로소 성장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어쩌면 나의 성장은 이미 끝났고 지금 이 비루한 상태가 나의 한계는 아닐까’하는 생각이 드는 이가 성장 이야기에 매혹되는 이유는 전과 같을 수 없다.

“미지의 것 때문에 금기의 억압이 있다면 작가는 자유로워지기 위하여 그것을 위반하고라도 확인해야만 한다.” 작가 황석영이 자전적 에세이 『수인』에서 밝힌 작가론(論)이다. 인간이 자유롭지 못한 이유는 사회가 정한 금기를 그대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어떤 금기가 지난 수 세기에 걸쳐 한 사회 혹은 한 문명에서 유효할 수 있는 이유는 그것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나 근원적 물음을 허용하지 않는 데 있다. 역사적으로 “이것이 왜 금기인지”, “이것은 정말 넘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와 같은 물음은 신성이나 공동체적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온 것이다. 성찰되지 않은 금기는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고, 자유를 억압당한 인간은 끊임없이 세상과 불화하며 괴로울 수밖에 없다. 이 지점에서 황석영의 표현을 확장하면, 작가가 글을 쓰는 이유는 세상이 정한 금기와 경계를 확인하고 기어코 ‘담을 넘기’(越牆) 위해서다. 담을 넘는다는 것은 인간을 억압하는 실체를 확인하고, 부(不)자유와 고통에서 해방하는 시도다.

그런데 이것이 대체 성장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성장담이 매력적인 이유는 어쩌면 모두가 겪었지만, 누구도 쉽게 말하지 못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른들은 모두 각자의 성장통을 겪으며 어른이 됐지만, 자신이 써 내려간 성장담이 무엇인지 쉽게 언어로 표현하지 못한다. 어떤 금기나 고난에 부딪혔는지, 그것을 어떻게 넘어섰는지, 그리고 무엇을 발견했는지와 같은 것 말이다. 이들이 겪었던 금기, 무지, 두려움, 용기, 진실, 자유와 같은 관념들을 이야기로 잘 엮으면 훌륭한 성장 서사가 완성될 것이라는 점을 상상해 볼 수 있다. 성장이란 금기를 뛰어넘어 진실과 마주하는 과정과 닮았다. 그리고 진실에서 자유를 획득하고 스스로 서는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바로 성장이다. 이러한 월장의 과정 자체가 성장의 중요한 구성요소라고 보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앵무새 죽이기』와 『앨저넌에게 꽃을』은 월장과 성장이라는 두 개의 관점에서 교본이 될 만한 작품이다. 그러면서도 당대를 지배하는 욕망과 폐부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도 충실히 담고 있다. 이어지는 절에서는 두 작품이 다루는 시대적 금기와 성장, 그리고 이러한 것들의 배경으로서 우생학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비평을 전개하고자 한다.


2. 작가와 텍스트의 사회·문화적 맥락: 대공황과 황금기, 그리고 우생학

『앵무새 죽이기』는 공황의 한 복판인 1930년대 미국 남부의 작은 마을 메이콤을 배경으로 한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미국 사회에 직·간접적인 인종차별은 만연하지만, 그중에서도 1930년대 미국 남부에서 흑인에 대한 차별은 특히 심각했다. 범죄가 발생하면 흑인이라는 이유로 가장 먼저 용의 선상에 올라야 했다. KKK단과 같은 폭력 집단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 또한 불황으로 흔들리는 경제적 토대가 사람들의 의식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지 상상해 보는 것도 중요하다. 부가 불평등한 것처럼, 가난도 불평등하다. 불황은 국가적이지만, 그 직접적인 영향과 피해는 피부색에 따라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불황이 일어날 때 경제적으로 가장 큰 타격을 입는 집단은 비극적이게도 그 사회 경제 구조의 밑바닥을 구성하는 집단이다. 

<앨저넌에게 꽃을>의 배경은 작품 속에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등장하는 여러 지명과 장치, 환경에서 유추했을 때 소설이 쓰인 1950년대 이후 현대 미국을 작품의 시대적 배경으로 보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지능 향상 수술이라는 초현실적 요소가 등장하는 SF 소설이라는 점은 고려해야 한다. 1950년대 미국은 대공황을 지나, 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이후 다시 전례 없는 호황을 경험한다.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유럽 중심의 패권이 해체되는 가운데 자유민주주의 진영의 패자(霸者)로서 자리매김한 시기다. 이때 미국이 얻은 자신감은 미국 사회를 지배하는 발전 지향적 풍조와 과학 기술 발전을 추동하는 원동력이 됐을 것이다. 

두 작품이 공통으로 보여주는 주된 코드는 소수자(약자)에 대한 주류의 편견이다. <앵무새 죽이기>는 마을 내 흑인에 대한 부정적 인식과 경계심 등이 혼재되어 나타난다. 흑인은 백인보다 지적으로 열등한 종이며 충동적이지만 강인한 육체를 지녀 위험하다는 인식이 대표적이다. 백인들은 흑인을 야만스러운 종으로 인식하고, 그러한 인식에서 아무런 죄의식 없이 노예제를 유지해 온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러한 차별은 20세기 중 후반까지도 사회에 공공연하게 남아있었다. <앨저넌에게 꽃을>에는 정신지체아에 대한 멸시와 더 나아가 이를 해결하기 위한 방식으로 의학적 실험과 수술이 등장한다. 지능이 평균 수준보다 낮은 존재는 사실상 인간으로서 인정받지 못하며, 집안에서는 감추어야 할 존재, 사회적으로 없는 존재로 격리되거나 매우 제한적인 역할만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다. 실험과 수술은 이들을 인격체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병리 현상이자 교정의 대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편견과 차별의 근거는 역사에서 찾을 수 있다. 바로 우생학(eugenics)이다. 흑인이라는 낙인, 그래서 지능이 낮고 충동적이며 폭력적일 것이라는 편견과 저지능아는 인간으로서 가치가 없다는 낙인은 두 작품의 근간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낙인은 자연스럽게 배제와 차별로 이어진다. 낙인에 근거한 배제와 차별은 우생학이라는 광기가 현실에서 작동하는 기본 원리다.


3. 텍스트 내용과 형식 분석: 금기, 용기와 진실, 성장 

우생학에 기반을 둔 낙인, 그리고 차별과 배제는 두 작품을 관통하는 사회·문화적 맥락이다. 이러한 맥락 속에서 두 작품은 주인공의 성장이라는 서사를 전개한다. 성장 서사는 앞서 언급했던 월장(越墻)에 빗대어 표현할 수 있다. 즉, 금기를 넘어 진실을 발견하고 자유로운 주체로 거듭나는 것이 성장의 과정인 셈이다.

3.1. 금기

금기는 금기시되는 대상이나 현상에 대한 미지와 무지를 유발하고 두려움을 낳는다. <앵무새 죽이기>에서 두드러지게 금기시되는 대상은 ‘흑인’과 소외된 이웃이다. 주인공인 스카웃 핀치는 메이콤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묘사하는데, 대체로 평화롭던 작품 전반이‘깜둥이’라는 단어가 빈번하게 등장하면서 위기감이 고조된다. 깜둥이는 그 자체로 흑인에 대한 멸칭이며 금기에 대한 묘사다. 주목할 점은 흑인에 대한 백인의 인식이 이중적이라는 것이다. 마을의 백인들은 ‘깜둥이’라는 말로 흑인을 멸시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지닌 강인한 힘과 (상상 속에서 만들어진) 폭력성을 두려워한다. 하지만 스카웃과 그의 오빠 잼은 이러한 어른들이 만든 금기에 의문을 갖는다. 그들이 존경하는 아버지인 애티커스가 무고한 흑인 청년 톰 로빈슨을 변호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미지의 존재인 이웃에 사는 부 래들리나 괴팍한 듀보스 할머니 같은 사람들도 두려움을 제공하는 금기로 등장한다. 어른들의 편견이 생산하는 ‘흑인’이라는 금기, 그리고 마찬가지로 소문에 쌓여 미지로 남아있는 ‘이웃’집의 담장이 이들이 뛰어넘어야 할 금기다.

<앨저넌에게 꽃을>에서 금기는 낮은 지능이며, 이를 드러내는 장치는 어머니의 폭력과 ‘수술’이다. 비록 작품에서는 ‘수술’이 내포하는 폭력성을 전면에 드러내지는 않지만, 수술을 통해 정신지체아의 지능을 높인다는 발상은 우생학의 기본적 논리로부터 자연스럽게 도출된다. 찰리는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로의 폭력에 노출되었다. 어머니에게 찰리는 이웃에 숨겨야 하고, 부끄러운 ‘금기’다. 그래서 윽박지르고 때리면서 그의 행동을 교정하려고 시도하지만, 시도는 끝내 실패하고 그를 버린다. 또한, 스스로가 누군가의 금기로 여겨졌다는 경험은 그의 잠재된 의식 속에 깊은 상처로 남는다.

물론 찰리도 스스로 똑똑해지고 싶은 욕구를 지니고 있다. 그렇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더욱 자신을 더 좋아할 것이라는 이유다. 이러한 점은 그의 욕망이 내재적인 것이 아닌 외부로부터 ‘만들어진’ 것임을 보여준다. 찰리의 이러한 욕망은 학계와 재단으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니머 교수와 스트라우스 박사의 욕망과 결합한다. 특히 니머 교수는 찰리를 인격체로 바라보기보다는, 자신의 목표를 달성할 수단으로써, 실험 대상으로서 간주한다. 똑똑해져야만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내면화할 수 밖에 없는 사회가 과연 건강할까. 지능을 근거로 인간의 조건을 규정하려 했다는 점은 미국 사회가 전후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만, 인간에 대한 인식과 의식 속에는 야만성과 빈곤함이 내포함을 보여준다.

3.2. 용기와 진실

<앵무새 죽이기>의 주인공인 스카웃과 잼은 모두 어린아이다. 이들은 흑인에 대해 어른들보다 상대적으로 편견 없는 시선을 지녔다. 하지만 스카웃과 잼이 진실, 흑인은 열등한 종이 아니며 백인과 똑같은 사람이라는 자명한 사실을 비로소 통감하는 계기는 아버지가 강간범으로 몰린 팀 로빈슨을 변호하면서다. 애티커스는 백인이 강간 혐의를 받는 흑인을 변호한다는 이유로 이웃 백인들로부터 무수히 많은 비난과 조롱, 그리고 위협을 받는다. 애티커스는 그러한 압력에 굴복하지 않고 그를 변호한다. 애티커스의 강인한 모습, 모든 인간의 평등한 가치와 존엄을 지키고자 하는 모습에서 스카웃과 잼은 진실을 발견한다. 만약 이들이 다른 어른이나 그들의 안전을 걱정하는 아버지의 염려대로 재판을 방청하지 않고 집에만 있었다면 진실을 목격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진실은 감히 그것을 알고자 하는 용기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앨저넌에게 꽃을> 속 찰리의 성장담이 지닌 비극은, 행복의 절정에서 소설이 끝나지 않는다는 점에 있다. 애초에 그가 참여한 실험은 한계가 있었고, 지적 수준이 정점에 도달한 뒤에는 미끄럼틀을 타듯이 급속도로 지적 능력과 기억을 잃어간다. 찰리는 수술을 통해 똑똑해지고, 많은 지식을 얻었지만 그것에서 진정한 자유를 얻는데는 실패한다. 지식 그 자체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삶에서 깨달아야 하는 진실이란 삶의 목적과 사랑이라는 것을 찰리는 나중에야 깨닫는다.

“하지만 지능 하나만으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게되었습니다. 여기 당신들의 대학에서는 지능과 교육과 지식을 모두 숭배하죠. 하지만 당신들이 모두 놓친 한 가지 사실을 이제 저는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지능과 교육도 인간에 대한 애정과 조화를 이루지 못하면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366p  

그 전까지 찰리는 수술을 통해 급속도로 성장한 자신의 지적 수준에 도취한 모습을 보인다. 앨리스와의 관계가 자꾸만 어긋나고, 많이 알지만 진정한 사랑에 도달하지 못하는 점 등이 그렇다.  사람에 대한 이해, 감성은 지식을 통해 도달할 수 없다. 오로지 깊은 사랑과 성찰을 통해서 가능하다는 것을 나중에야 비로소 깨닫는다. 그리고 그는 곧 자신의 지능이 급속도로 떨어질 것이라는 걸 알게 된다. 만약 그가 남은 시각을 살아 낼 용기를 발휘하지 못했다면 크게 낙담하고 혼란과 좌절 속에서 무기력하게 퇴행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자신이 간과했던 점을 인정하고 남아있는 지능과 열정을 끝까지 연구를 위해 불태우는 모습은 그가 비로소 용기를 발휘해 진실을 직시했다는 점을 의미한다. 

3.3. 성장

애티커스의 헌신적인 변호에도 불구하고, 톰은 죽음을 맞이한다. 하지만 이제 스카웃과 잼은 전보다 많은 것을 이해한다. 어른들의 편견과 판단을 그대로 수용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부 래들리가 평범하고 따뜻한 마음씨를 지닌 이웃이라는 점을 알게 됐다. 세상이 마냥 정의롭지도, 밝은 면으로만 가득하지 않다는 것도 안다. 스카웃과 잼은 어른들의 편견과 미지에서 오는 두려움을 넘어 스스로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자신감을 얻었다. “집으로 걸어가는 동안 나는 오빠와 내가 자랐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는 독백은 스카웃의 내적 성장을 잘 보여준다. 

<앨저넌에게 꽃을>의 마지막 장면을 보자. 수술의 부작용으로 찰리의 지적능력은 급속도로 퇴화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원래대로 돌아갔다고 해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할 수 있을까. 기억은 사라져도, 마음에 깊이 각인된 흔적은 사라지지 않는다. 형식적인 것, 껍데기가 사라지면 비로소 본질적인 것, 알맹이만 남는다. 선물 같았던 일련의 시간 속에서 찰리를 진정 성장하도록 한 것은 책과 지식이 아니라 사랑이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처럼, 이제 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전과 다르다. 

“키니언 선생님 혹시 이 글을 일그면 저를 안쓰럽게 생각하지 마새요. 선생님이 말한 대로 똑똑해져서 인생에서 두 번째 기회를 얻을 수 있어서 기뻐요. 세상에 있는지도 몰랐던 많은 것들을 배웠기 때문이에요. 잠깐일지라도 그것을 볼 수 있었다는 것에 감사합니다. 그리고 가족들과 저 자신에 대해 전부 알게 되어서 기뻐요. 가족들을 기어캐내고 만나고 나니까 마치 없었던 가족이 생겨난 거 같았고 이제야 제게도 가족이 있고 저도 다른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는 걸 알게 되었어요.” -452p 

찰리의 진정한 성장 이야기는 아마 책의 마지막 장을 덮은 이후에 본격적으로 펼쳐질 것 같다. 이제 찰리는 수술이 아니라, 자신의 힘으로 자유를 얻기 위해 노력할 것이기 때문이다. 봄날은 달콤하지만, 영원히 봄날에 머물 수는 없는 법이다.  작가가 남기지 않은 뒷이야기는 아쉽지만, 각자의 마음속 평행 우주에서 그려야겠다.


4. 성장의 미적분학과 현대적 의미

두 작품은 주인공이 성장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금기의 맥락에 우생학이 자리 잡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점을 보인다. 하지만 두 작품에서 나타나는 성장의 양상은 조금 다른 방향이다. 스카웃의 성장은 경험과 통감 속에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고 진실을 쌓아가는 점에서 적분적이다. 앎과 경험이 쌓이면 무지에서 오는 두려움이 그 만큼 줄어드는 것이다. 스카웃의 성장은 그가 새롭게 알게된 것에 비례적이며 순행적이다. 

반면 찰리의 성장은 다시 지능이 퇴행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는 점에서 역행적이다. 찰리의 성장은 퇴행 이후 사라지지 않고 남는 것에서 비롯된다. 무엇이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가라는 질문에 찰리는 답할 수 있을 것이다. 상승과 추락의 과정에서 본질적이지 않은 것은 모두 거르고 오직 인간다움을 이루는 고갱이를 남기는 과정이라는 점에서 찰리의 성장은 미분적이다.

끝으로 두 작품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를 살펴보자. <앵무새 죽이기>는 표면적으로 흑인으로 대표되는 인종 차별 의식에 대한 비판이다. 우리는 인종 차별을 비난하며, 특히 미국 내 흑인 차별이 야만적인 문화라는 점에 동의한다. 한국 사회는 어떤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도 역시 인종 간 차등을 갖고 그들을 대한다. 흑인보다는 백인에게 호감을 느끼며, 경제적으로 가난한 국가에서 온 이들에게는 멸시와 차별적인 대우를 하지 않던가. 작품 속 스카웃이 바라보는 메이콤의 백인들의 행태는 우리에게 성찰을 촉구한다. 우리가 차별받는 것은 절대 용납하지 못하지만, 동시에 피부색을 근거로 편견에 사로잡혀 약자를 규정하고 배제와 차별을 저지르지 않던가.

<앨저넌에게 꽃을>은 우선 한국 사회의 교육열과 연관 지을 수 있을 것이다. 한국 사회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높은 교육열을 보인다. 상대적인 교육 수준도 높다. 하지만 그러한 교육열과 교육 수준이 학생들, 나아가 국민들의 행복으로 직결되는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든다. 지식을 넘어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감성, 인간에 대한 애정 없이는 어떤 배움도 무용하다는 것을 작품 속 찰리는 여실히 드러낸다. 또한, 인간의 가치를 쉽게 그 사람의 지적 수준과 같은 외적 지표로 평가하는 행태도 성찰할 수 있다. 한국 사회는 IQ나 학위, 학벌 등과 같은 지적 수준을 나타내는 지표를 통해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한 개인이 지닌 다양한 특성 중 인지적 능력을 주로 나타낼 뿐이지만 그것이 그 개인을 총체적으로 평가하는 기준으로 작용하고, 사회적 지위와 부에도 영향을 미치는 것은 문제다.

  1. 2017년 12월 작성. 글쓴이가 다니는 대학의 비평문 대회에 응모했던 글이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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