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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당신은 누구인가

-오찬호, 『우리는 차별에 찬성합니다』, 개마고원, 2013

-2016.11 작성


인터넷 검색 엔진에 ‘대학생’을 검색해 보았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연관 검색어로 ‘대학생 시위’ ‘대학생 시국 선언’ 등의 키워드가 제일 먼저 눈에 띈다. 그리고 그 옆으로 ‘대학생 등록금’ ‘대학생 취업’ ‘‘취업 준비생’ 등의 낱말이 따라붙는다. 두 단어 군 사이에는 조금은 괴리감이 느껴지지만, 모두 지금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학생들을 표현하는 말이다. 한쪽에는 국가적 위기를 걱정하며 거리로, 광장으로 모이는 ‘실천적 지식인’으로서의 대학생이 있다. 또 한 쪽에는 스스로 감당하기 어려운 등록금과 생활비를 걱정하며, 갈수록 좁아지는 취업 문을 통과하기 위해 하루하루 살아내는 ‘취준생’(취업 준비생의 준말)으로서의 대학생이 있다. 두 가지 모습 사이에 제법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모두 대학생이 지닌 얼굴이다.


1. 대학생 담론


한때 세대론이 유행하면서, 대학생 세대를 규정하려는 움직임도 활발했다. ‘88만 원 세대’를 필두로, ‘n포 세대’ ‘달관 세대’ 등 그 이름도 다양하다. 이러한 시도와 규정들의 결은 저마다 조금씩 달랐지만 모두 그들에게 특정한 ‘자세’를 요구한다는 공통점을 보인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그러니 힘내라” “성공하기 위해서는 맷집이 필요하다. 좀 더 버텨라” “노력으로는 부족하니 노오력하라” “미친 세상에 저항하라” “토익 책을 내려놓고 짱돌을 들어라.” 등등 지금까지의 대학생 세대 담론(혹은 청년 담론, 이십 대 담론)은 주로 그들에게 어떤 행동이나 태도를 주문하는 식으로 귀결됐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대학생들이 오늘날 ‘안녕하지 못한’ 시대의 피해자이고 희생자라는 인식이 깔려있다. 물론 이는 현실이고 사실이다. 하지만 그것뿐일까.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에서 저자의 시각은 조금 더 넓다. 그들은 과연 오직 피해자이기만 한가. 더 나아가 ‘괴물이 되어버린 대학생’을 지적하기에 이른다. 그것이 <우리는 차별을 찬성합니다>가 공론장을 벌이는 지점이다.


2. 가해자가 된 피해자, 출신 성분까지 따진다


저자는 대학생들이 시대의 피해자, 희생자임을 인정하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되어간다고 지적한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살아가는 대학생들은 기성세대가 규정한 정상성의 궤도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는 불안함과 그렇게 해도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받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시달린다.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강박적으로 자기계발에 몰두한다. 정상성은 주로 당위성의 형식으로 주어지곤 한다. ‘취업하려면 ~을 해야 한다’ ‘~살 전엔 취업해야 한다’ ‘토익 점수는 ~점 이상이어야 한다’는 식으로 기준을 제시하는 것이다. 이러한 목표는 흔히 타인과의 비교와 함께 제시되며 이를 달성하지 못하면 패배자로 낙인 찍히고 만다.


이를 달성하기 위한 모든 것들이 자기계발로 일컬어진다. 자기계발은 기성세대에 의해 규정된 공인되는 성공 혹은 성취를 위한 수단이자 목적이다. 자기계발의 요체는 효율적인 시간 관리와 철저한 자기 통제다. 어려운 말 하나 없지만, 결코 달성하기 쉽지 않다. 단지 운이 좋아서, 혹은 외부의 자본을 활용해 시간을 사실상 사거나 외부의 힘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대학생은 남들보다 앞서 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자기계발의 성패는 수능 점수, 대학 서열, 학과 서열 등 줄 세우기로 나타난다.  


자기계발에 마취된 대학생들에게 나타나는 주된 증상은 타인의 고통에 대해 무감각과 인정에 대한 강한 욕구다. 자신은 죽을 만큼 노력해서 이 자리까지 왔으니 나를 인정해 달라. 혹은 이 자리에 오르지 못한 너희들은 노력하지 않은 것이니 열악한 처우를 받아들여야 한다. 그들에겐 생존권을 위해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는 KTX 승무원들이나, 학벌에 의한 차별을 방지하기 위해 이력서에서 출신학교란을 삭제하라는 요구 모두 이해하기 어렵다. 누군가 노력을 통해 적법하게 얻은 지위와 자원을 부정하고 결과적으로 역차별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이들은 비정규직 양산이 내 이웃의 문제, 가족의 문제, 나아가 내가 겪을 수 있는 일이라는 점은 바라보지 못한다. 그들이 지금도 겪는 고통은 느끼지 못한다. 신자유주의 기조 속에서, 자본주의 경제 구조의 한계로 모두가 노력해도 인간다운 삶을 영위하기 힘들다는 점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구별 짓기의 대상과 범주는 갈수록 세밀해진다. 과거 대학과 대학 간에 존재했던 구별은, 같은 대학 내 학과와 학과의 구별로 확대됐다. 서울대와 부산대의 차이만 존재하다가, 경영학과와 철학과의 차이도 구별 짓기 시작한 것이다. 본교-분교 캠퍼스 간 차이는 물론이고, 이제는 어떻게 입학했는지도 중요하다. 정시생이냐 수시생이냐, 논술 전형이냐 지역 균형 전형이냐. ‘출신 성분’까지 따져가며 서로 비교 우위를 점하고자 한다.


3. ‘지거국’ 부산대학교라는 특수성


논의를 주변으로 끌어보자. 학벌 위계질서의 피라미드에서 부산대학교가, 부산대생이 지닌 위상은 조금 독특하다. 인터넷에선 흔히 부산대를 ‘지거국’(지방 거점 국립대학교의 줄임말)의 수장으로 표현한다. 이 표현은 양면성을 지닌다. 지방에 소재한 국립대학교 중 가장 ‘잘 나간다’는 뜻이 첫 번째다. 동시에 그래 봤자 서울이 아니라 지방에 소재한 대학교라는 점을 부각하는 말이기도 하다. 수도권 중심주의적 관점에서 부산대는 ‘지방에 위치한 국립대 중 학벌 위계질서의 피라미드 상층부에 자리 잡았지만, 그래 봤자 지방대’라는 경계와 인정과 부정의 시선을 동시에 받는다. 이는 특히 입시 성적에서 비슷한 급간에 자리 잡은 대학과의 비교에서 특히 나타난다. 이러한 시선은 요즘도 입시 철이 되면 수험생 커뮤니티에 등장하는 “건동홍(건국대, 동국대, 홍익대를 묶어서 일컫는 말) vs 부산대”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주 목격할 수 있다.


1학년 시절을 되돌아본다. 주변엔 온통 “시험을 망쳐서 부산대에 왔다”는 친구들뿐이었다. 그들의 말을 의심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그 말이 전부 진실이라면 부산대는 모두 한두 문제 차이로 (그들의 입장에서) ‘인 서울 명문대 입학’이라는 청운의 꿈을 접고 자리 잡은 아쉬움이 서린 곳이리라. 부산대 신입생들의 70% 이상이 부산·울산·경남 지역 출신이라는 점에서 그들에게 부산대는 일종의 마지노선이었을 것이다. 어쨌거나 수능 날, 딱 내 실력만큼 점수를 받고 내 성적으로 갈 수 있는 국립대 중 학벌 위계 질서의 피라미드 상 가장 상층부에 있는 부산대에 입학한 나로서는 그들 앞에서 조금 민망하기도 했다. 


4. 우리 안의 숨겨진 욕망(?)


4년 가까이 학교에 다니면서 다행히도 주변의 부산대 학생들에게 이 책에 등장하는 것처럼 극단적(?)인 사례를 경험한 적은 없었다. 많은 학생은 겸손했고, 특히 지방 거점 국립대로서 부산대의 위상을 생각할 때 이상하다 싶을 정도로 자조적이고, 자기 비하적인 모습도 보이곤 했다. 반수와 재수를 끊임없이 고민하는 친구도 있었고, 재수에 ‘성공’해 서울 소재 대학에 입학한 친구를 부러워하는 모습도 종종 목격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내재된 인정 욕구, 혹은 구별 짓기 욕구도 발견할 수 있었다. 2011년 여름방학 무렵, 갑작스럽게 부경대학교와의 통합 추진설이 나돌았다. 방학이 끝나고 2학기 개강과 동시에 학교는 통합 추진설로 시끄러웠다. 학생들은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통합 반대를 외쳤다. “학생들의 여론 수렴 없는 총장의 독단적인 추진에 반대한다”는 것이 주된 이유였다. 물론 이러한 지적은 타당하며 반대할 충분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이러한 표어 뒤에 숨겨진 다양한 욕망의 결은 서로 엇비슷할지도 모른다. 친구들과 통합 추진에 대해 대화를 나누면서 “솔직히 부경대 애들이랑 같은 졸업장 받으면 억울하다”는 말부터 “이참에 자퇴하고 수능을 다시 쳐서 서울로 가야겠다”는 말까지 솔직한 반응을 접할 수 있었다.


얼마 전까지 떠들썩했던 부산 지역 국공립대학 연합 추진도 그렇다. 부산 지역 국공립대와 연합체를 구성하겠다는 총장의 계획에 총학생을 필두로 많은 학생이 반발했다. 그리고 총장과 총학생회장의 간담회에서 모 학과의 학생회장이 총장에게 의견을 밝혔다. “솔직히 부경대 학생과 수학 능력에서 차이를 보이는데, 통합돼서 그 학생들과 같은 수업을 듣고 같은 졸업장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는 것이다. 그 몇 점의 수학 능력, 물론 엄연한 차이다. 하지만 그는 정말 그 차이를 ‘걱정’하는 것일까. 그것보다 방점은 “나보다 낮은 수능 점수를 받은 학생과 같은 졸업장을 받기 싫다”는 것은 아닐까. 어쩌면 이러한 반응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 지극히 일반적이고 당연한지도 모른다. 스스로 학벌 위계질서의 피라미드의 높지도 낮지도 않은 그 어딘가 있다고 말하면서도, 그렇게 높지 않다고 자조하면서도, 사실은 그것이 높은 편이라는 것을 알지만 그렇다고 말하기엔 자신이 없어서, 하지만 나름대로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그만큼 학벌 위계질서에 대한 우리의 감정은 매우 연약하고도 취약한, 그래서 위험한 부분이다.


5. 그 학벌을 넘어선 자본


학벌 위계질서가 하루아침에 무너지기를 바라는 것은 요원한 일이다. 단순히 대학 간의 서열의 문제가 아니라 이것이 작동하는 사회 경제 문화적 배경과도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가운데 시민 단체 ‘학벌 없는 사회’의 해산은 곱씹어 볼 대목이다. 학벌 없는 사회는 지난 18년간 서울대를 정점으로 하는 한국 사회의 학벌 위계질서와 그로 인한 차별 구조를 철폐하기 위해 노력한 단체다. 하지만 해산문에서 그들이 밝힌 해산의 이유는 씁쓸하기만 하다. 그들은 “여전히 학벌 사회에 살고 있지만, 학벌이 더는 권력 획득의 주요 기제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판단 아래 활동을 접을 수밖에 없음을 토로했다. 이제는 학벌보다 자본의 획득과 독점이 더 강력하고 지배적이다. 심지어 자본을 획득하는 것이 학벌조차 휩쓸어 버릴 정도로 사회의 공동체적 성격 자체가 소멸하였다는 것이다. 그만큼 학벌과 권력의 연결이 느슨해진 결과 학벌을 가졌더라도 삶의 안정을 유지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다. 대학생들이 진리의 빛으로 여기는 수능 점수와 그것으로 획득한 학벌 위계질서의 정점에 선들 이제는 더는 장밋빛 미래를 낙관할 수 없다. 결과적으로 학벌이 과거보다 큰 의미를 상실한 이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대학생들은 웃어야 할까 울어야 할까. 


 “노동자가 아니기에 구조조정엔 찬성하지만/임금인상투쟁엔 머리띠 묶고 참석한다/집주인이기에 쓰레기매각장 건립엔 반대하지만/국가 경제를 위한 원전과 운하 건설은 찬성이다/한 사람의 시민이기에 광우병 소는 안되지만/농수산물 시장개방과 한미FTA는 찬성이다 학부모로서/학교폭력은 안되지만, 한 남성으로/원조교제는 싫지 않다 사람이기에/소말리아 아이들을 보면 눈물이 나고/미군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는 반대하지만/북한에 보내는 쌀은 상호주의에 어긋나고/미군은 절대 철수하면 안된다//도대체 당신은 누구인가?” (송경동, <당신은 누구인가> 중에서)


그러니까 당신은 누구인가. 당신이 획득한 수능 점수를 빼고, 당신이 다니는 대학의 간판을 때고, 당신이 입은 과잠을 벗으면 무엇이 남겠는가. 대학생의 괴물성은 자신을 감싸고 있던 모든 껍데기를 벗겼을 때 남은 자신의 알맹이를 드러낼 때 특히 나타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것은 사실 공격이라기보다는 방어성의 발로에 가깝다. 무엇도 자신을 지킬 수 없는 불확실한 사회에서 유일하게 자신을 입증하고 증명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 옷이 학벌인 셈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 증표마저 자본에 의해 그 값어치가 점차 떨어져 간다.


학벌은 온전히 본인이 행한 노력만의 결과가 아니라는 점은 명확하다. 하지만 몸소 차별을 행하는 것은 결국 대학생 자신이다. 부모의 경제적 지원의 차이, 그 밖의 배경에 힘입어 우리는 각자의 학벌을 얻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지금도 가장 공정한 시험 제도로서 수능을 찬양하고, 자기계발에 몰두하고 줄 세우기와 차별을 합리화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도 차별에 동조하고 찬성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서서히 괴물이 되어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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