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제가 끝나고, 삶이 형벌이 되는 순간_『에브리맨』
축제가 끝나고, 삶이 형벌이 되는 순간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에브리맨』, 문학동네, 2009
사람은 누구나 늙어서 죽는다. 이 단순한 명제가 어느 날 갑자기, 쓸데없이 무겁게 느껴질 때가 있다면 필립 로스의 『에브리맨』을 꺼내 볼 만하다. 짧고도 빠르게 지나간 인생의 황금기를 뒤로하고 길고도 느리게 서서히 죽음을 향해 다가가는 주인공. 화려했던 지난날의 파티가 끝나고 홀로 빈 연회장에 내던져진 존재가 느낄 수 있는 외로움과 고통을 담담하게 그리고 섬세하게 보여준다.
소설은 주인공의 장례식을 비추며 시작한다. 그를 아끼던 형이 추도사를 낭독하며 지난날을 추억할 때 사람들은 함께 눈물을 흘린다. 몇 명의 자녀는 빼고. 그가 보낸 삶의 궤적이 크게 독특하다고 하긴 어렵다. 여느 보통 사람들처럼 적당한 성취와 적당한 좌절, 어느 소설가의 말처럼 ‘영욕(榮辱)은 반반’인 그런 삶. 아니 세속적인 기준에서 영이 욕보다 약간은 더 몸피가 큰 성공적인 삶이었는지도 모른다. 광고 기획자로서 자신의 분야에서 나름의 성취를 이뤘고 은퇴 후에는 어린 시절 열망했던 그림을 그리며 여생을 보낼 수 있는 행운을 누리기도 한다. 몇 차례 결혼과 파혼을 반복하긴 했지만, 순전히 본인의 주체할 수 없는 바람기 탓이었으니 그냥 인과응보일 뿐이다. 자신의 욕망에 충실히 따르면서도 일에서는 성취를 이뤄냈고, 본인이 하고 싶었던 일을 취미 삼아 여생을 보내는 삶. 이 정도면 대박은 아니더라도 중박 정도는 되지 않을까. 물론 외도로 가정을 파탄 낸 그의 편력이 결코 바람직하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젊은 시절부터 때때로 그를 급습하던 여러 병은 나이가 들어서도 끉이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레 약해진 육체는 병마의 습격을 가까스로 버텨내지만, 그에게 서서히 고통을 선사하며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을 암시한다. 말년의 그를 품은 것은 팔 할이 병실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게다가 젊은 시절 자신의 함금기를 함께 보냈던 친구들, 미술 교실에서 만난, 마음을 나누던 또래가 하나둘씩 세상을 떠나갈 때 그가 느낀 것은 무엇일까. 몸도 편치 않고, 마음을 편히 둘 곳도 서서히 사라진다.
그뿐만 아니다. 그가 자신의 욕망에 이끌려 살아오면서 상처 주고 실망하게 했던 사람들, 특히 외도로 상처 주었던 전 부인과 그녀와의 사이에서 둔 자녀들. 그들의 냉담한 태도 앞에서 그는 연약해지기만 한다. 다시 되돌릴 수 없을 만큼 어그러진 관계들은 홀로 남은 그를 점점 더 외롭게 만든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뒤늦게 깨닫지만, 너무 늦었다. 물밀 듯 다가오는 회한이 그를 덮쳐오고 그는 무기력하게 휩쓸린다.
모든 것은 자신이 선택한 것이고 상당 부분을 자기 뜻대로, 욕망대로 이루는 행운을 누렸지만, 막상 삶의 끝자락에 다다른 그는 후회하고 있다. 누군가에게 용서를 구하기에도, 일그러진 무언가를 회복하기에도, 너무 늦어버렸다고 느낄 때 그는 빠져나올 수 없는 외로움 그 자체에 휩싸인다. 홀로 남겨진 삶의 무게는 그가 더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겁게 그를 짓누른다.
남은 시간의 무게를 홀로 감당해야 한다는 생각이 문득 떠오를 때. 그리고 그 이유가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던, 돌아보면 바보스러운 선택들 때문이라는 점이 분명해졌을 때. 그 되돌릴 수 없는 시간과 선택들을 고스란히 짊어져야 하는 순간에 바로 나이 듦과 죽음이 특별히 무겁게 다가오는 게 아닐까. 그런 생의 끝자락에 다다른 평범한 사람(everyman)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의 아버지가 남긴 말처럼 “되돌아보고 네가 속죄할 수 있는 것은 속죄하고 남은 인생을 최대한 활용해”(177p) 보는 것뿐. 물론 말처럼 쉽지 않을 것 같지만, 딱히 더 나은 선택지도 없어 보인다.
사람은 누구나 늙어서 죽는다. 그리고 결코 화해할 수 없을 것 같은 삶의 반대편을 발견할 때 남은 삶은 두려움이 된다.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견뎌낼 수 있을까. 때로는 두려움을 직시하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고 구원이 되는 순간이 분명 있는 것 같다. 삶의 무게를 버거워하고 바보 같은 고민을 하는 사람이 나 말고도 또 있구나.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내고, 그래서 지금도 누군가는 하릴없이 소설을 쓰고, 읽어 나가는 건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