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릴없는 책 읽기

시간이 지우는 것과 지우지 못하는 것,『오래된 정원』에 대한 단상

지금+여기 2018. 3. 26. 00:00

시간이 지우는 것과 지우지 못하는 것

-황석영, 『오래된 정원』, 창비, 2000

-2017년 3월 작성


오래된 정원, 그 곳엔 완성하지 못한 초상화가 남아있고 지워지지 않은 사람이 살고 있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흐릿하게 만들지만 끝내 지워지지 않는 것들도 남긴다. 그 시간 속에서 우리는 사랑하고 미워하고, 용서하고, 화해하지만, 결국 우리가 사랑한 것은 무엇이었는가 스스로 묻게 되버린다. 그리고 그 지점에서 다시 더 긴 시간이 흐르면 어떻게 될까. 알 수 없다. 나는 아직 그만한 시간을 체험하지 못했다. 무서운 것은 시간이고, 무엇도 그것을 이길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고들 한다. 그럼에도 다시 지금까지의 노트를 찬찬히 살펴본다. 지울 수 없는 문장들, 시간을 이겨내고 영원히 유효할 것만 같은 문장들이 남아있다. 마침표는 문장의 종결을 의미하지만 그것만으로 서사가 막을 내렸는지는 알 수 없다. 다시 펜을 들 것이고 이어서 새롭게 문장을 시작한다. 다시 스스로에게 물어야 할 때다. 무엇을 어떻게 사랑했는지가 아니라, 무엇을 어떻게 사랑할 것인지를. 



"당신도 이제는 나이가 많이 들었겠지요. 우리가 지켜내려고 안간힘을 쓰고 버티어왔던 가치들은 산산이 부서졌지만 아직도 속세의 먼지 가운데서 빛나고 있어요.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한번 다시 시작해야 할 것입니다. 당신은 그 외롭고 캄캄한 벽 속에서 무엇을 찾았나요. 혹시 바위 틈 사이로 뚫린 길을 걸어들어가 갑자기 환하고 찬란한 햇빛 가운데 색색가지의 꽃이 만발한 세상을 본 건 아닌가요. 당신은 우리의 오래된 정원을 찾았나요?" (p.647-648)[각주:1]





  1. 황석영 문학 50년 기념 특별한정판 기준. 2012년 발간된 특별한정판 은 기존 상-하 두 권을 한 권으로 합본했다. [본문으로]